고통의 문제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해보고 있어요.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견뎌야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안에서 '즐거워해야'하는 일곱 가지 이유를 제시를 해요. 고난의 경험은 우리 믿음의 진실성을 검증하기 위한 시험이기 때문에 우리 믿음을 더 강하게 하시리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첫번째이유이고요. 두번째는 고난 이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며, 계속해서 고난은 그리스도에게 그러했듯이 우리에게도 영광에 이르는 길이고, 고난은 성령을 더 깊이 경험하는, 복을 받을 기회이고, 고난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회이고, 고난은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시작될 때 복음의 적절성을 증명할 기회이며, 고난은 하나님과 그분의 신실하심에 우리 자신을 부탁할 기회라고 해요. 저는 고난과 고통을 생각하면서 고난과 고통의 차이가 뭘까?를 생각해봤어요. 어떤 신학자는 고난은 하나님께로 부터 온거고, 고통은 세상적인것이라고 구분을 지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고난과 고통 둘다 어쩌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둘다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봐요. 루이스는 고난을 하나님의 확성기로 비유하고 있어요. 그만큼 고난이나 고통은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회라는 거죠. 이비유는 베드로가 제시한 이유와 같아 보여요. 여하튼, 고난이라는 것은 한자를 풀이해보면 쓰고 어렵다라는 뜻이며, 고통이라는 것은 쓰고 아프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요. 여기서 쓰다라는 것은 괴로운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아프다라는 것은 견딜수 없는 상태라고 해요. 그래서 고난과 고통. 둘다 성격은 같은거죠. 견딜수 없는 상태에서 어렵고 아픈거죠. 몸이 아프든, 마음이 아프든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즐거워해야 한다고 해요. 그시대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좋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고 해요. 거의 불통의 대명사로 쓰였어요.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원치 않거나 시기적절하지 않는 조언을 하는 사람"으로 언급되었거든요. 그래서 그 시대의 고난은 우리 시대와의 고난과 다른 것 같아요. 그들의 어떤 타락으로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예수님때문에 받은 이유없는 고난이었어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유가 많은 것 같아요. 자칫 잘못하면 기복으로 빠질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곰곰히 생각해봐요. 우리가 구지 받지 말아야 할 고난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봐요. 하지만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받아야 할 고난은 즐거워해야 한다는 거죠. 그리고 실제로 고난 속에서 나누는 고제는 다른 어떤 경우에 나누는 교제보다 더 강하고 깊은 법이라고 해요. 존 페어렐은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라고 묻지 말고, 고통의 순간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라고 물으라고 해요. 그리고 이어 그는 말해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징표는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고통 중에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라고,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닌것 같아요.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해요. 여전히 고통과 고난의 문제는 풀리지 않는 숙제인것 같은데, 죽음에 이르게 될 수록 이 문제에 대해 알 수 있지 않을 까 싶네요.
-말씀과 기도로 사람을 세우는 복남이^^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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