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완종회장님의 자살과 그 영향력에 대해 오늘 아침 생각을 해봤어요. 결국 '돈'으로 귀결이 되었어요. 성완종회장은 성실했고, 누구보다도 아이들을 아꼈고 그래서 장학재단을 설립해서 도와주었고, 그리고 그런 꿈을 실현하고 경남기업이라는 회사를 키우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고, 그래서 정치를 해야만 했고, 그 정치를 통해서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지키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 '성공'에 대해 이야기할때, 저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거든요. 가장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그 자체라고, 일관된 가치를 추구하며 자아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성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이죠. 성완종회장님의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이 마음이 아픈건 그 분의 성공이 틀려서가 아니라, 너무 정치라는 권력과 힘을 의지했다는 거에요.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나쁜것이 아닌데 말이죠. 어떻게 보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과 아픔을 보는 것 같아요. 입시 위주의 경쟁적인 학교 구조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것이 더 큰 문제이겠죠. 어느 뉴스를 보니, 양심선언을 한 교사에게 징계를 내리는 것을 보면서, 물론 정치적 중립의 의무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보복성으로 이뤄지는 모습을 보면서 한숨만 나올뿐이에요. 협력하기보다는 비교와 경쟁을 통해 승자가 되어야 하는 구조 속에서 아이들은 폭력적인 관계가 형성될 수 밖에 없다는 구조적 모순이 있는 거죠. 파커파머의 말이 기억니 나요. "제도가 공동체보다는 경쟁을 만들어 낼때, 지적 삶이 우리를 연결시켜주기보다는 오히려 격리시킬때, 우리의 마음은 활력을 잃고 우리를 지탱하는 것이 거의 사라지고 만다" 결국, 교육의 고통은 단절의 고통이라는 거죠. 이런 관계성 단절은 소속감이나 유대감을 약화시켜 결과적으로 공동체성을 살실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음이 아파요. 박숙영선생님이 이런말을 한적이 있어요. 사람은 관대한 공간에서 가장 잘 배운다. 즉, 안전한 공간과 정서적 평안이 없는 곳에서는 어떠한 배움과 교육도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거에요. 단절보다는 연결에, 수치심 자극보다는 공감에 초점을 둬야 함을 깨닫게 돼요. 이런 배움의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 가르침이 아닌가 싶어요. 수라하트는 "존중이란 말의 핵심의미는 살핀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무엇을 허용한다 보기보다는 살핀다에 초점을 두는 거죠. 그렇다고 일방적인 희생으로 무조건 상대방을 살피는 것은 옳지않다고 봐요. 서로 살피는 거죠, 그것이 상호존중이고, 그것이 윈윈이라고 생각해요.지식이 삶과 연결되어 각기 다른 개인들이 서로의 삶을 공감하며 친구가 되고, 개별적 존재들이 모여 공동체로 성장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교육의 역할이라고 보는 박숙영선생님의 생각과 같아요.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의 대상이 되었던 시대와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과 공감할 수 없는 가치관을 펼치려 했다는 거에요. 사람들이 땀 흘리며 수고할 때는 딴 마음을 가질 겨를이 없지만 번성하여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하나님의 DNA를 물려 받았다는 자기 정체성과 하나님 앞에 선 긴장감을 소홀히 여기는 전과기록을 씻어내지 못하는 습성이 있는 것 같아요. 성기종회장의 일련의 사건을 보면서, 여러가지들을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네요.
-말씀과 기도로 사람을 세우는 복남이^^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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