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냇가에 심은 나무 /달달한 묵상일기

주토피아를 보고

복남진우 2016. 4. 23. 10:53


2016년 4월 22일 묵상일기. 기분날씨 : 좋음.


 하나님의 은혜로 제게 주어진 몫을 잘 할 수 있었어요. 돕는자를 붙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감사하고, 혼자 해봐야지 하는 담대함을 주신 하나님께도 감사하고요. 그래도 여전히 불안하고, 힘듬이 있네요. 이 또한 지나가겠죠.

 어제는 사랑하는 이와 주토피아라는 영화를 봤어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하며 꼭 봐야 한다는 설득에 제가 넘어간거죠. 그리고 영화를 보는내내 영화에 빠져 들었어요. 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한 저로서는 놓치지 말아야 할 점들이 있었어요. 다수와 소수, 분배와 정의라는 철학적 논쟁은 일단 내려놓고 묵상해보려고 해요. 그러면 저또한 복잡해지거든요.

 주토피아에 대한 줄거리는 이글을 읽는 분들들에게 과제로 남기려 해요. 즉, 한번 보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거에요. 저의 괜한 스포로 영화에 대한 재미를 떨어 뜨릴 수 있으니깐요.

 주토피아라는 도시에서는 동물의 특성에 따라 직업을 나눴고, 사는 곳도 나눴어요. 동물의 왕인 사자는 시장이고, 물소와 같은 동물들은 경찰이었고, 여우는 사기꾼, 그리고 반전인 동물이 있었는데 바로 양이었어요. 양은 처음에 시장 보좌관이었는데, 나중에 반전의 동물로 나오게 돼요. 여러 영화들을 보면서 제가 받았던 메시지는 그랬어요. "이 세상은 불평등하다. 맞다. 이 사회는 불평등하다. 그런데 어쩔 수 없다. 이 불평등한 사회속에서, 너희들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너희들의 몫을 감당해라, 너희들이 이 사회를 바꿔보려고 해도 이사회는 바뀌는 것이 없으니 쓸데없이 힘빼지 말아라, 너희들만 힘들어 질뿐이다."  주토피아에서도 보여준 것 또한, "동물의 세계에는 계급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사회 속에서, 꿈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 꿈을 이루는 것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자신의 배경 안에서 열심히 살라는 것"이라고 봐요. 왜냐하면, 주인공 토끼 주디는 자신의 꿈을 이루지만, 결국 승진도 못한채 소위 말하는 높은 사람들로 부터 상처와 배려를 받으며 그 사회에 만족하며 살라고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영화를 재미있게 본 사람들에게는 죄송한 마음이 드는데, 저는 보수와 진보의 균형있는 사회를 원하는데, 보수에 치우친, 혹은 진보만을 옹호하는 세계관은 우리가 비판적으로 봐야 될 것 같아요.

 온 국민이 사랑했던, 태양의 후예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의사와 군인이 나왔고, 의사이기 때문에 생명을 살려야 했고, 군인은 또다른 생명을 죽이면서 까지 국가를 지켜야 했고, 국민을 지켜야 했어요. 그 안에서 갈등이 있었고, 그 갈등을 멜로적 요소로 잘 승화시켰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단지 멜로의 관점에서만 태양의 후예라는 드라마를 보면 안될 것 같아요. 그 안에서 주는 메시지들을 잘 살펴봐야 한다는 거죠. 억지 애국심이 아닌,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만이 애국이 아닌, 일상의 삶속에서 세금 잘내고, 국방의 의무를 다하며, 희망을 가지고 자신의 몫을 처절하게 감당하고 있는 우리들이 진정한 애국자가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태양의 후예를 보면, 진짜로 애국해야 하는 사람들의 변화는 없고, 사립병원의 한 의사와 한 특전사 대위의 변화가 나오죠, 위에서 부터 아래로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 건데, 사회는 그데로 였고, 윗사람들도 그데로 였어요. 단지 대위 유시진과 의사 강모연의 감정의 변화만 있었어요. 즉, 바뀌지 않는 사회 속에서 지극지 한 사람, 개인을 다룬 거죠. 정의를 위해서라면, 규칙도 원칙도 무시하면서 까지 노인과 미인과 아이들을 지키는 한 사람인거죠. 그건 국가의 몫이며, 우리 모두의 몫인데, 대위 유시진의 몫으로만 남겨둔 아쉬움이 크다라는 거에요.

 여하튼, 태양의 후예의 애청자로서, 주토피아를 본 관객의 한사람으로 할 말이 많네요. 그리고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고요. 태양의 후예는 다시한번 생각해보기로 하고요. 주토피아에 대해서 다시 돌아와서 생각해보고 싶어요.

 하나님께서는 소외된 이웃 즉,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눈을 돌리라고 해요. 저 또한 사회적 소수자가 될 수 있고요. 대안학교 교사로서 그렇게 느낄떄가 많고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사회적 소수자'들의 목소리에 무관심해 보여요. 토끼 주디는 사회적 소수자, 사회적 약자, 소외된 이웃이었어요. 그리고 그 사회에서는 '작은 동물은 경찰을 하면 안된다. 홍당무 농사를 짓고 살아야 한다.'라는 사회적 편견이 있었어요. 주디는 경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사회적 약자로 그런 편견과 차별에 맞서서 싸워야만 했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강자이고, 누가 약자인가? 하는 질문이에요.

 우리안에는 크고 작은 '편견'들이 있는데, 그 편견이 차별을 만들죠. 도전하기를 좋아하는 주디에게도 외로움이 있었고, 여우스프레이를 착용할 만큼 두려움도 있었어요. 시장 보좌관인 양 벨 웨더는 작은 동물을 대변하고 있었지만, 결국 반전의 동물로,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육식동물들을 역차별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90퍼센트가 초식동물들이었고, 10퍼센트가 육식동물들이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숫적으로 본다면 분명 육식동물들도 사회적 약자였어요. 그들 또한 육식동물로 태어난 것 뿐 그들이 잘못한 것이 없거든요. 마치 우리 사회에서 금수저로 태어난 사람들을 달갑게 보지 않는 것 처럼 말이죠. 사실 태후에 나온 다니엘 같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국민밉상들이 많긴 많은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요.

 주토피아는 처음에 볼 때에는 '하나님 나라'를 연상하게 했어요. 사자와 양이 함께 어울리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랬어요. 하지만 그곳은 결코 완전한 도시가 아니었고, 그곳을 살아가는 동물들 또한 완전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끊임없이 그러면서 변화해 나간다는 거죠. 저는 그 변화가 좋은변화인지, 나쁜변화인지 잘 모르겠어요. 제가 생각하는 변화는 최소한 '사회적 소수자의 변화만이 아닌, 소위 말하는 권력자들, 사회적강자들의 변화'도 포함되니깐요. 하지만 영화가 주는 의미는 크다고 봐요. 주디의 대사에서 "변화의 시작은 당신이고 바로 나야, 정확하게는 우리 모두인거죠", "Try everything"  , "포기하지마"라는 대사가 계속 귓가에 멤돌면서, 디즈니가 어떤 의도로 영화를 만들고, 편집을 했든, 우리는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를 새겨봐야 할 것 같네요.

 저에게도 이야기 해주고 싶네요.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어 진우야. 그러니 포기하지마, 변화되어 보자, 그리고 변화시켜 보자, 하나님의 기준으로 말이야"


-말씀과 기도로 사람을 세우는 복남이^^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