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냇가에 심은 나무 /달달한 묵상일기

내 삶의 주인, 예수님

복남진우 2016. 3. 23. 10:28


2016년 3월 23일 묵상일기. 기분날씨 : 좋음.


 초콜렛김치를 상상해보면, 정말 먹기 싫어질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복음을 초콜렛김치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보게 돼요. 정민영선교사님의 말씀을 계속 듣고 있는데, 강조점이 하나인것 같아요. "오직예수" 예날에는 설교시간때마다 자주 들었는데, 어느순간부터 "오직예수"만을 외치는 설교를 듣기가 힘들어졌던 것 같아요. 현실에 맞춰, 현실에 사는 우리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라는 말로 정당화 되어 "오직예수"라는 메시지가 우선순위에서 멀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아요.

 오늘은 고린도후서 4장 5-12절 말씀을 들었는데, 고린도 교회 성도님들은 '듣고 싶은 데로, 자신이 소원한데로' 하나님을 길들이려고 했어요. 하지만 사도바울을 그들에게 명확히 이야기하고 있어요. "말씀을 뒤틀지 말아라 진리를 선명하게 드러내야 한다"고 말이죠. 

 여기에서 두가지 질문이 던져져요. 첫번째가 '무엇으로 부터 무엇으로 인가?', 두번째는 '누가, 어떻게 바꿀것인가?'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둠에서 빛으로, 세상에서 생명으로 가야 한다는 거고 그 생명은 예수님처럼 사는 것임을 깨닫게 돼요. 그래서 생명을 잃는 것보다 헛된 삶을 사는 것이 삶을 낭비하는 것이 두려워지는 것 같아요. 두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세상을 바꾸시는 거고, 우리는 '질'그릇임을 자각하게 돼요. 질그릇은 약해요. 그런데 한국교회나 우리는 왜이리 오만불손한지 반성하게 되네요.

 큰능력은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해요.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강하신 거죠. 그런데 저는 착각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큰능력이 있는 하나님께 기도하면 내가 강해지는 것 같았어요. 그게 아니라, 강한 우리 하나님이 나를 통해, 나의 기도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거죠. 기도자체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마치 "열려라 참깨"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바꾸시는 것임을 다시한번 강조하고 싶네요.

 "그리스도 충족성"이라는 신학적 용어가 있다고 해요. 세상의 변화를 가져올 때, 주님으로 충분하다는 거죠. 우리는 극소화되고, 주님은 극대화 되어야 하는 이유에요.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귀여울때가 많아요. 자기네들이 할수도 없는데, 어른들을 위해 해준다고 했을때 많이 귀여운 것 같아요. 우리조카들을 보면, 제가 아플때, 장난감 청진기를 가지고 오고, 장난감 약을 가지고 와서 진심을 다해 저를 진찰해주는 모습을 보면, 왜이리 사랑스러운지 모르겠어요. 우리 하나님도 그럴것 같아요. 내가 내힘으로 무엇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 안에는 '서로 사랑함'이 있음을 깨닫게 돼요. 

 존스토트가 마지막 설교제목이 "그리스도를 닮음"이라는 설교를 했다고 해요. 왜? 마지막에 그리스도를 닮으라고 했을까?를 생각해보면서, 구원이라는 것은 천국가서 잘먹고 잘사는 것이 아닌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임을 깨닫게 돼요.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라는 책을 읽어봐야 겠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것 자체가 특권임을 가슴속에 새기며, 기독교사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보게 돼요. 세월호를 버린 선장의 모습이 십자가를 버린 그리스도인과 같으면 안되겠죠? 설교시간에 한 선생님의 고백을 생각해봐요. "내 삶의 주인이 예수님이 되는 것, 그것을 연습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사람을 세우는 복남이^^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