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냇가에 심은 나무 /달달한 묵상일기

일상성이 특별한 순간을 규정한다

복남진우 2016. 1. 9. 17:53

 

2016년 1월 4일 묵상일기. 기분날씨 : 좋음

 이문식 목사님의 성경강해가 시작되었어요. 이문식 목사님께서 다니엘서를 볼때, 2가지를 고려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첫번째로, 그 시대의 맥락속에서 역사적 해석을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즉,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의미인가?를 살펴보라는 거죠. 그리고 두번째는옛날이나 지금이나 다 있는 비슷한 점이 있는데, 그것을 찾아보라고 하셨어요. 오늘의 상황속에서 그 의미를 유추하고 적용해 볼 수 있다고 하신 거죠. 그래서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메시지를 찾아야 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먼저 역사적 해석을 해보면,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눠지고,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했고,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해요. 18대 여호야김 왕이 있었는데, 이때 여호야김 왕은 애굽을 의지했어요. 하나님께서는 바벨론도, 애굽도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했는데, 말을 듣지 않은거죠. 그래서 여기서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어요. "사람은 사랑하고 용서할 대상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도록 사람을 훈련시킨다"에요. 그래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허나 의지하면 그 사람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이문식 목사님께서 이런 표현을 하시더라구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BC605년 갈그레스 전투에서 애굽은 폐배하고 느부갓네살왕이 승리를 해요. 여호야김은 포로끌려가고 그외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게 돼요. 그것을 제 1차 바벨론 유수라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해서 3차까지 유수가 일어나요. 그리고 586년에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을 당하게 돼요. 이때 그과정속에서 다니엘과 그 세친구들이 위기를 겪게 돼요.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쓰여지는 기구들이 바벨론의 신전으로 들어갔어요. 그것이 다니넬이 겪는 최초의 위기였어요. 하나님에 대한 정체성의 위기에요. 고대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라고 할 만큼 자기들의 신을 굉장히 우상화 했어요. 그래서 이긴나라의 신은 신들중에 가장 센 신이 되었고요. 오랫동안 버텨내는 나라의 순서에 따라 신들의 서열이 나눠지기도 하였고요. 하지만 하나님은 형상화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고 단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기명들을 가져간거에요. 그리고 자기권력의 신격화를 시켜버린거에요. 바로 신관의 위기인데, 하나님은 과연 유일신인가?, 아니면 민족신인가? 지방신인가? 하는 혼란이 생겼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다니엘에게서는 신의 변증이란 과제가 있었던 것 같아요. 하나님의 심판은 항상 먼저 자기백성에게 일어나는 것을 깨닫게 돼요. 그래서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시는 거죠. 이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에요. 이시대를 살아가는 저에게도 이런 위기가 굉장히 많은 것 같아요. 작년 세월호사건부터 해서, 부정부패, 여러 사회문제들 가운데 하나님이 안계시는 것 같고, 숨어있으신 것 같은 느낌은 충분히 위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니엘도 똑같은 상황인것 같아요. 나라가 멸망당했고, 심지어는 하나님께 에배드렸던 기명까지 왕의 술잔으로 사용되어질만큼 내가 믿는 하나님은 왜 침묵하실까? 하는 혼란이 있었을거에요. 하지만 다니엘은 고백해요. "우리 조상들이 우상숭배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멸망당한 것이다." 우상숭배의 일상화의 상황속에서 우상숭배를 하지 않기로 다니엘을 결심을 해요. 하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선지자적 역사의식과 거룩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세상에 동조하는 아이를 만들면 안된다라는 것과 선지자적인 필터링이 필요하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 같아요. Identity 정체성이라는 이단어를 생각해봐요. 하나님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뜻을 정하여'이긴 다니엘의 영성을 묵상해봐요. 아마도 다니엘은 스스로 물어봤을 것 같아요. "내가 누구냐?" 그리고 스스로 답하면서 하나님앞에서 절대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뜻을 정했을 거에요. 하나님께서는 뜻을 정할때, 모든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을 묵상하게 돼요. 그래서 하나님이 보너스로 무엇을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애를 쓸필요가 없는 거죠. 교사로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싶어요. 마틴 로이드 존스라는 분이 있는데, 그분은 의사의 길에서 충분히 형통할 수 있는데 목사의 길로 갔어요. 그 이유는 존경했던 선배의사들의 출세욕으로 인해서 그랬다고 해요. 하나님의 순리는 소명을 주시고, 구별되게 하시고, 귀하게 여겨주시고, 올바른 삶, 가치, 행복을 발견하게 해주시는 것 같아요. 이문식 목사님께서 우스갯 소리로 원로는 원칙없이 사는 노인, 목사는 목적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젊을때 뜻을 세우고, 본질을 추구하고 살아갈때 거기에서 빛이나는 것 같아요. 이것이 바로 다니엘의 영성이라고 생각해요.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숨어계시다고 생각할 때 다니엘은 뜻을 정했ㄷ는 사실이 정말 대단한것 같아요. 성공주의 기독교에서, 번영주의 기독교에서 그럴 수 있다는 것은 훌륭해요. 하나님이 숨어계실때, 침묵하고 계신 하나님에 대한 고뇌는 저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 같아요. 유대인 수용소에서 어떤 랍비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해요. "여호와 하나님은 어디에 게십니까?" 6살짜리가 고통가운데 교수형에 처해지는 상황속에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그 랍니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해요. "He is there" 죽음가운데 함께하신다는 거죠. 많은 유대인들이 그 이후 무신론자가 되거나, 사회주의자가 되었다고 해요. 지금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80%나 된다고 하는데, 지금 우리 사회도 그러고 있는 것 같아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닌, 우리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봐요. 우리의 죽음속에 계신, 초월적인 하나이 아닌 내재하신 하나님이 내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묵상하게 되는 것 같아요. 드때도 예수님을 향하여 "내려와봐라"하고 조롱했자나요.  결국, 능력이 아니라 전도의 미련한것으로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라는 거에요. 역설적인 기독교의 진리라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두번재로 다니엘에게 찾아왔던 위기는 자기정체성의 위기였어요. 느부갓네살 왕은 탕평책을 통해서 바벨론화 하려고 했어요. 마치 일본유학파들이 친일파가 되는 것 처럼 만드려 했던 거죠. 하나님보다 자기들의 이익, 기득권, 관계가 중요했고 이것이 우상이 되어버린, 하나님앞에서 자기부정을 못하게 되어버린 이것이 바로 우상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왕은 다니엘과 세친구의 이름을 바꿔불렀어요. 하지만 다니엘은 하나님앞에,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의 터치를 경험했어요. 즉, 날마다 하나님의 터치를 경험했고, 하나님의 감동과 감화를 경험했어요. 이제는 오직 골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이라고 고백해야 하는 시대가 왔어요. 아론의 황금송아지처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번영신앙을 강조하면서 아론의 금송아지를 숭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봐야 할 것 같아요. 잃어버린 지성소에서 변화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요. 일상의 거룩을 회복되기를 기도해요. 결국 개인의 경건이 무너지면 우리의 신앙은 무너지게 되겠죠. "일상성이 특별한 순간을 규정한다"라는 말을 가슴깊이 새겨봐요.

 

-말씀과 기도로 사람을 세우는 복남이^^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