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냇가에 심은 나무 /달달한 묵상일기

하나님 안에서 질문을 던져라

복남진우 2017. 11. 25. 13:29


2017년 11월 25일,  나의 감정 날씨 : 좋음. 

묵상찬양 : 찬송가 442(저 장미꽃 위에 이슬),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올해 들어서 묵상일기를 거의 쓰지 못하고 있네요. 핑계 일지 모르겠지만, 거의 주말 없는 삶, 저녁이 없는 삶을 살아 왔던 것 같아요. '시간이 없어서 못했어요.' 라는 말을 아이들에게 들으면, 교사인 저는 '그건 핑계야. 정직하게 말하지 못하겠니?' 라고 말하는 저인데, 저부터도 할 말이 없네요. 저에게도 인격이 있듯이, 분명 아이들에게 인격이 있고,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늘 생각하게 되네요. 또한, 나도 죄인임을 기억해요.

 어제는 남양주시청 다산홀에서 중등의 밤 행사를 치뤄냈어요. 중등의 밤의 행사는 각 반별로, 각 동아리 별로 자신들이 준비한 것들을 보여주는 자리인데, 우리 반은 밴드공연으로 준비를 했어요. 그리고 우리 중등 여학생들은 걸그룹 못지 않은 춤실력을 보여주었고요. 그 시간들을 통해서 아이들의 '끼'와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고, 그 끼와 에너지를 발산시켜줄 수 있는 장들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어요. 그런데, 학부모님들은 5시간이 넘는 공연에 많이들 지치셨던 것 같아요. 또한, 시청관계자는 늦어지는 시간 떄문에 항의전화가 계속 들어 왔고, 진행하는 스텝 아이들도 폭팔 직전 까지 갔던 점에서 더 나은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볼 필요 또한 느끼게 되었네요. 아무리 좋은 내용을 가지고 있더라고, 그 내용을 담아줄 형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힘들어 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한번 보게 되네요.

 그리고 오늘!! 오랜만에 나의 안해의 출타로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봐요. 솔직히 저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거든요. 스스로 사색하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좀더 멋지게 표현해 본다면, 철학하는 것을 좋아해요. 철학은 정답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법을 알려주고 있거든요. 소크라테스와 니체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만한가치가 없다.", "삶의 낯설고 의문스러운 것을 찾아내는 것이 철학이다."  라고 말하고 있어요. 이들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다양성을 강조하고 질문으로 철학을 실행했다는 거에요. 기존의 권위와 관습을 따르지 않고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자신과 세상에 던진거죠.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말하고 있어요. 동굴에서 앞만 바라보게 묶인 죄소들이 있고, 그들은 벽에 비친 그림자를 현실이라고 믿고 살아요. 어느날 죄수 한명이 사슬을 끊고 뒤로 돌아 그림자의 본체인 실체를 봐요. 그리고 동굴 밖으로 나가 진짜 세상을 보고 동굴로 돌아와 다른 죄수들에게 알리죠. 편견과 선입견이 갇힌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믿을까요? 만약 믿지 않는다면, 그들을 둘러싼 동굴 속 그림자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봐요.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정신의 세가지 변신을 이야기 해요. 즉, 새로운 도덕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낙타-사자-어린아이' 세 가지 변신을 겪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첫째,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지는 짐승으로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규범과 관습의 무게를 지는 단계에요. 낙타의 시기에 스스로에게 던져야 하는 질문은 "나에게 제일 무거운 것은 무엇인가?"에요. 우리 아이들은 경쟁의 시스템 속에서 열등감고 불안감이 클거에요. 질문과 답을 통해 현재 자기에에 무엇이 가장 무거운 문제인지 알아야 하고 이를 견뎌야 성장할 수 있다고 해요.

 둘째, 사자는 의무에서 벗어나 "나는 이렇게 할 것이다"라는 자유 의지를 가진 상태라고 해요.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를 획득하고, 인정할 수 없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힘을 갖는 단계인거죠. 이 시기에는 "내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파괴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하는 거죠.

 셋째, 어린아이는 새로운 시작, 무한한 긍정의 힘을 가지고 놀이하듯 삶을 사는 단계에요. "나는 무엇을 창조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새로운 도덕을 창조해 내는 거죠. 

 플라톤의 동굴이야기와 니체의 정신의 세 가지 변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새로운 창조, 도덕은 처음부터 순진무구한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죄수, 낙타와 같은 편견의 상태를 거치면서 깨우친다는 거에요. 즉, 관찰하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고, 생각하지 않으면 질문을 할 수 없는 거에요. 답을 찾는 과정은 지루하고 힘들고 어려울 수 있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동굴에서 나와 어린 아이와 같이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철학자들은 이야기 하고 있어요. 

 특히, 니체는 이렇듯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던 것으로 유명해요. 그는 그 이유를 "믿음이 실천을 담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 해요. 어쩌면, 그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라고 말한 성경 말씀처럼, 이 말씀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해보게 되네요.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 주님과의 추억을 쌓는 일임을 깨닫게 되고,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고전 11장 26절),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눅 22장 16절) 것임을 고백하고, 실천을 담보하는 결단을 지금 이시간 해보게 되네요.


- 말씀과 기도로 사람을 세우는 복남쌤^^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