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냇가에 심은 나무 /달달한 묵상일기

2015년 7월 27일 죄된본성과 사랑의 본성

복남진우 2015. 7. 27. 16:13

 

 본 파이퍼는 음욕이라는 죄를 자신의 눈을 빼버릴 정도의 진지함으로 임해야 하는 싸움이라고 해요. 베드로는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라고 이야기 하고 있어요. 어렸을적부터 저는 구원과 삶은 별개의 문제로 배웠고 그렇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런데 한번쯤은 의문을 던져봐요. 기독교인이라는 사람이 저럴 수 있을까? 과연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잃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솔직히 저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제 자신도 배워온 것이 있기 때문에 회피하고 직면하지 않는 거일수도 있지만요. 수많은 신앙고백자들이 이렇듯 현실의 삶과 구원을 분리시키는 구원관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스도인들이 큰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앞에 선다면 이것은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자라고 들어 왔는데, 결국은 죄에 대해서 우리는 맞서 싸워야 한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 같아요. 사도바울은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을 나열하고 나서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될것이다 라고 골로새서 3장 5-6절에서 이야기 하고 있어요. 교회는 사람이 모이는 곳이며, 지도자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인데, 우리는 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의문을 던져보게 되는 것 같아요. 대조적으로 인간의 다른 본성에 대해 묵상해보려고 해요. 존경하는 선생님께 수잔존슨의 <<우리는 사랑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라는 책을 추천받아 읽고 있는데 바로 이 책에 매료당했어요.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려보라고 하면 아마도 모두가 다 다를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수잔존슨이 여러 임상과 이론들을 통해 그 정의를 내려보려고 하는 도전이 흥미를 끌게 하는 것 같아요. 사람은 누군가와 연결되었을 때  최고가 될 수 있다고 해요.그리고 인간은 이기적으로 창조되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공감할 수 있다고 해요. 타인과 함께, 그리고 타인을 위해 느끼는 감정이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라고 전제를 깔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죄성과 상반되는 것이라 어떤 해석인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인간은 공감능력을 가진 채로 태어났지만 이런 인간의 속성은 거부되고 무시되었다고 해요.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는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정서적 반응과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해요. 사랑하는 사람과 더 많이 가까워질수록 타인의 욕구를 내것처럼 깊은 관심을 갖고 반응을 하고요. 그래서 인간은 서로 의지하는 애착이 형성되어 있고 그런 인간을 '결합의 인간'이라고 해요. 마지막으로 이점을 생각해보고 싶어요. 우리의 죄성을 이기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려고 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할때, 우리는 그 사랑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여전히 죄와 씨름하려는 본성과 사랑하고 사랑받으려는 본성. 어떤 본성이 우리의 진짜 본성일까요? 사랑하고 사랑받으려는 본성이 진짜본성이라면 죄된본성들이 균열을 일으킬때 깨트리고 나올 수있도록 힘써야 겠네요.

 

-말씀과 기도로 사람을 세우는 복남이^^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