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냇가에 심은 나무 /달달한 묵상일기

2015년 6월 26일 만선의 기쁨과 빈배의 우울

복남진우 2015. 6. 27. 13:14

 

 누가복음 5장 1절에서 11절 말씀은 유명한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와요. 이 본문의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늘 다르게 다가오는 것은 말씀의 생명력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어렸을때에는 그저 이 말씀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고 있구나, 그리고 좀 더 커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구나,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나의 깊은데가 어디인가?를 생각해봤는데, 이번에 묵상할때에는 만선과 빈배를 묵상하게 되었어요. 베드로는 밤새도록 애를 썼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어요. 즉, 베드로는 실패자였던 거죠. 세상에서 그를 평가할때 이렇게 평가할 수 도 있을 것 같아요. "고기 한마리도 잡지 못해서 뭐먹고 살래, 그리고 너희 가족들은 어떻게 먹여 살릴 수 있겠니?" 그런 좌절의 상태에서 베드로에게 주님이 말씀하세요.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베드로는 시키는데로 했어요. 그랬더니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고, 오히려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을 하며 와서 자기를 도와달라고까지 했어요. 성경을 보면, 고기가 얼마나 많이 잡혔던지 고기를 두 배에 가득히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고 해요. 제가 주목했던 장면은 고기가 많이 잡혀 가라앉을 지경이 되어버린 만선의 배가 아니었어요. 제가 봤던 것은 8절말씀이었어요. 8절말씀에 베드로의 고백이 나와요.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베드로의 시선이 바뀐거였어요. 그의 시선은 빈배도 아니었고, 만선의 배도 아니었어요. 그저 자기자신이었고, 내가 어떻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복음으로 살 수 있겠구나를 깨달은거였어요. 즉, 진정한 복음을 만나거였죠. 아마도 자신은 늘 빈배와 만선의 배에서 왔다갔다 하며 살았을 거에요. 빈배를 볼때면 열등감과 불안과 염려로 늘 좌절하고 넘어졌을거구, 만선의 배를 보면서 우쭐하기도 하고, 우월감을 가지기도 하고, 교만하기도 했을 거구요. 하지만 주님의 관심은 빈배도 아니고, 만선의 배도 아니라는 거였죠. 주님의 관심은 얼마나 자기를 의지하느냐? 얼마나 자기를 믿느냐? 얼마나 자기를 신뢰하느냐? 인거죠. 주님의 기준을 조금씩 깨달아 가는 것 같아요. 저또한 자꾸 빈배를 바라보기도 하고, 만선의 배를 바라보기도 하는 것 같아요. 로마서 1장에 나오는 파탄의 생활을 하는 사람은 아니겠지만, 로마서 2장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기독교사로 살아가니깐 조금은 낫다고 생각하며 얼마나 우쭐하며 살았는지,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풍자처럼, 다 도진개진인것을 말이죠.  초등학생들은 7곱하기 8은 56인데, 46이라고 답하는 친구가 있고, 55라고 답하는 친구가 있다고 해요. 그런데 둘 다 틀린건데, 55맞은 친구가 선생님께 와서 따진다고 해요. 왜? 46이라고 쓴 친구보다는 답에 근접하게 썼는데 틀렸다고 하냐고? 하나님앞에서 우리가 이런모습이지 않은가 싶어요. 우리의 어리석음인거죠. 하나님의 심판대앞에서는 똑같이 틀린것은 틀린거니깐요. 우리가 생각할 때 조금더 큰죄를 졌다고 해서, 조금 덜 죄를 짓지 않았다고, 우리가 생각할 때 도덕적인 기준이 높았다고 한들, 하나님앞에서는 다 똑같은 죄인이라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앞에서 회개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게 돼요. 조금 덜 한것 때문에 나는 좀 괜찮다고 한다면 하나님앞에서 할말이 없을 것 같아요. 직면이라는거,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해결해 가는 것인데, 우리는 아담처럼 나무밑에 숨어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이것은 상담용어로 회피라고 하는데, 그것은 두려움과 많은 고통이 동반되기 때문인것 같아요. 직면하는것이 얼마나 두렵고 고통이 따르는 것인지, 이찬수목사님의 말씀이 와닿아요. 사도행전에 2장 37절말씀에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 꼬"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요한복음 19장 34절에 "군인들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라는 말씀에서 "찌른다"라는 말이 같은어원이라고 해요. 그리고 사도행전 7장 56-57절에 "그들이 마음에 찔려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는 사건"이 나오는데, 여기서 찔림도 같은 의미이고요. 그래서 직면당한다는 것은 옆구리를 찔리는 것 같은, 돌로 쳐 맞아 죽을 것 같은 고통과 두려움인거죠. 그렇다고 직면하지 않고 하나님앞에서 계속 은폐하려 한다면 더 큰 고통을 찾아온다고 해요.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1년동안 은폐를 했다가 얼마나 더 큰 고통을 맛봐야 했는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어요. 시편 33편 3절에 다윗의 처절한 고백이 나오자나요.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나이다" 안들킨다고 좋아할 게 아니라, 자기 뼈가 쇠하여 지는 것을 알아차려야 하는 거죠. 드러내는 것은 분명히 수치심이에요.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운 더 큰 고통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드러내야 하는 거죠. 빈배에 있는 사람이나 만선의 배에 있는 사람이나, 로마서 1장에 인생파탄자나 로마서 2장 조금 더 나은 사람이나 모두가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묵상하게 되네요. 나의 삶은 얼마나 빈배와 만선의 배 사이를 오락가락 하고 있는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내가 처한 현실만 보게 되니 두려움과 고통, 교만과 허세 가운데 오락가락 하는 것 같아요. 이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물이 찢어질 듯 축복해주실도 있으시고, 빈배의 허탈감가운데 깨닫게 해주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의지해요.

 

-말씀과 기도로 사람을 세우는 복남이^^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