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냇가에 심은 나무 /달달한 묵상일기

2015년 6월 20일 건전한 비판

복남진우 2015. 6. 20. 14:48

 

 어제 오늘 많은 묵상과 생각을 해본 것 같아요. 먼저 저의 삶을 나누면 어제 도청에서 친구와 함께 길거리 농구를 했어요. 길거리 농구는 4대4로 밀어내기 식으로 농구경기를 하는데, 승부욕이 넘치는 남자들에게 있어서 끊을수 없는 즐거움인 것 같아요. 제가 이 이야기를 하냐면, 즐겁게 하다가 다른사람이 자신의 머리로 저의 턱을 가격하는 바람에 저의 턱관절과 주변의 근육이 타박상을 입게 되었어요. 주변의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가장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 턱관절이라고 하는데, 여하튼 저의 부주의로 다치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아침에 밥을 먹는 것 조차도 불편하더라구요. 그런와중에 남자의 죄성에 대해 제가 사랑하는 자와 함께 전화를 통화를 하면서 나눔을 했어요. 남자들은 다 그러더라,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어서. 부인할 수 도 없고, 그렇다고 대한민국의 모든 남자들을 변호하자니 그렇지 않은 남자들도 많아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남자라면 남자의 죄된본성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힘겨워하고 이겨내기 위해 힘쓰고 있다라고 말이죠. 저 또한 예외가 아니에요. 많은 사람들은 은밀하게 숨기기에 급급하지만 저는 정직하게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하지만 우리사회분위기 자체가 평가하고, 판단하기 좋아하는 분위기이다 보니, 오히려 정직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누군가의 실족을 가져올 수 있어서 조심스럽기도 한 부분인것 같아요. 그래서 결론은 남자의 죄된 본성은 돈, 명예, 성 나아가 스포츠까지 조심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려봤네요. 앞에 열거했던 것들이 다 나쁘다는 것이 아니지만, 이것들이 타락의 길로 가게 하는 지름길이라면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는게 맞다고 보거든요. 조심해서 될 문제가 아니죠. 어쩌면 우리의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하는 영적인 씨름이자, 영적전쟁이라고 봐요. 저의 삶나눔을 하다보니 묵상의 글이 길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하지만 날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가 있기에 저는 정리를 해두고 싶네요. 그리고 나누고 싶어요. 동일하게 저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으실 분이 있을지 모르고, 은혜가 되시는 분도 있을꺼라 믿어요. 이찬수목사님의 말씀을 1주일에 1번정도는 꼭 들어요. 오늘도 이찬수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건강한 비판의 회복이라는 설교였어요. 본문은 로마서 2장 1-4절 말씀이었고요. 건강한교회일수록 건강한 비판이 필요하다고 해요. 저는 이말을 다양하게 적용해보고 싶어요. 건강한 공동체일수록 건강한 비판이 필요하다. 건간한 개인일수록 건강한 비판이 필요하다 등으로요. 비판이라는 말은 저의 연구분야이기도 한데, 비판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의 옭고 그름을 밝히고 잘못된 점을 지적해주는 거에요. 그래서 비판이라는 것 자체가 나쁜것은 아니죠. 다시말해서 건전한 비판은 해야 된다는 거에요. 아예 무책임하게 안하는 것은 아니고요. 저는 아이들에게 수업을 하고 나서 가끔물어요. "선생님의 수업은 어때?" 그러면 아이들이 이야기를 해줘요. 그럼 거기서 저는 다 듣게 되면 제자신이 실족할 수 있어서, 그 중에 몇가지 정도는 깊이 새겨듣는것이 있거든요. 그래서 병든비판과 건전한 비판을 분별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변든 비판은 교만이나 우월감으로 하는 비판이고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못하는 비판이라고 해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 어떻게 대답할지 상상해봐야 할 것 같아요. 하나님이 나에게 "어찌하여 누구를 업신여겼느냐?"물으실까봐 두렵기도 해요. 그리고 성경에서는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라는 말씀이 종종나오는데, 자신의 들보를 보라는 거겠죠. 내인생의 멘토가 되어준 한마디라는 책을 보면 이런말이 나와요. "어떤 결점이 나에게도 있고 익숙하니깐 비판하는 거다"결국 누군가를 비판해서 힘들게 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이 그런 결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거겠죠. 그리고 고난은 우리에게 변장하고 온 축복이라고 하는데, 지혜로운자는 우리에게 오는 고난을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메시지를 주시려고 하는지 찾는 사람이라고 해요. 그리고 더 지혜로운 자는 남의 고난을 보고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찾아보는 사람이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우리는 고난과 비판의 말들을 먼저 나에게 돌리는 노력들이 필요한 것 같아요. "누구의 실수를 통해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하는 물음은 정말 중요해보여요. "다음 네 차례야 정신 똑바로 차려라 진우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반대로 건강한 비판은 복음이 지닌 긍휼의 정신으로 하는 비판이고 상대방을 깨우치고 살리기 위해 하는 비판이라고 해요. 즉, 상대방의 아픔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거에요. 불쌍히 여기다라는 말은 컴패션이라고 해요. 여기서 컴은 함께라는 말이고, 패션은 고통이라는 말인데, 그래서 고통을 함께하다는 뜻이 바로 긍휼인거죠. 그래서 우리는 늘 이렇게 기도해야 하나봐요. "사랑하지 않으면 비판하지 않게 해주세요" 저는 이기도가 간절해요. 기독교사로 살면서 얼마나 많이 아이들에게 비판을 하는지, 반성하게 되네요. "아이가 나를 인간적으로 좋아하기전에는 교육을 하지 마라 아이와 인간적인 교감이 생기기 전에 행하는 수업은 교사의 욕망충족행위이지 교육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와닿네요. 우리아이들을 보면 정말 불쌍한 마음이 들어요. 학생시절에는 성적과 명문대로 목숨을 걸고 사회에 나가면 성적이 돈이 되고, 명문대가 부자가 되어버리는 이 사회의 현실이 불행하기만 하네요. 불행하게 공부하고 불행하게 졸업하고, 불행하게 살다가 불행하게 죽는게 인생이라면 정말 허무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우리나라 교육은 왜? 바뀌지 않을까요? 이질문은 늘 저에게 도전을 주는 질문이 되네요. 우리나라 국회의원 229명중 121명이 기독교인이고, 우리나라 고위관료들 중 40%이상이 기독교인이며, 대학학장및 총장중 80%가 기독교인이라고 해요. 그런데 이분들은 다 대형교회를 다니고 있고요. 장발장에 나오는 미리엘주교의 사랑이 그리워지는 시대인것 같아요. 하지만, 무조건 비판만 해서는 안된다고 봐요. 헤이그밀사사건, 국채보상운동, 3.1운동, 물산장려운동등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었고 아직도 사회복지민간부문의 80%를 차지하는 단체가 기독교단체라는 사실은 희망적이에요. 우리의 역사가, 지금의 현실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고,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고, 우리아이들이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해요. 찬양의 고백을 드려요.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모든 것 주님께 드립니다. 사랑으로 나를 안아주시고 나를 새롭게 하소서"

 

-말씀과 기도로 사람을 세우는 복남이^^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