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냇가에 심은 나무 /달달한 묵상일기

2015년 4월 19일 나인성의 한 과부

복남진우 2015. 4. 19. 08:57

 

누가복음 7장 11절에서 17절 말씀을 보면, 나인이라는 성에서 장례를 치르기위해 나오는 무리를 만나요. 여기에서는 외아들을 잃은 '한과부'를 주님께서 보시고, 가엾게 여기시며 '관'을 손으로 만지시면서 말씀하세요.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리고 그 젊은이는 살아났고, 가버나움에서 부터 따라온 큰무리와 장례행렬에 있었던 무리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고백해요. "하나님이 돌아오셔서 자기 백성의 필요를 돌보아주신다"(유진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 이 장면에서 여러해석질문들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것은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시작하여 본문에서 저자의 의도와 메시지를 찾아가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면서 생각나는 질문들과 아이디어들을 꾸준히 적어 보며 탐색작업을 진행하는 거죠. 이 때 예기치못했던 아이디어들이 분출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더라구요. 여하튼, 저는 이장면에서 몇가지 해석방향을 잡을 수 있었어요. 예수님께서는 먼저 가버나움에서 나인성으로 가신 이유와 과부의 어떤면을 보고 가엾게 여기셨는지, 보통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보이실때 그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시거나 기적을 베푸시는 경우가 많았는데 말이죠. 과부나 어린아이 같은경우는 시대적 약자이긴 하지만, 단지 약하고 소외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셨는지 궁금하더라구요. 그리고 아들이 살아났는데, 이후 어머니의 반응이 석연치 않더라구요. 오히려 무리들이 반응을 보이더라구요. 어머니의 반응은 없고요. 그래서 더더욱 호기심이 생겼어요.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이후 믿음을 보이지 않는 이 과부에게 적극적인 관심과 행동이 눈에 들어오더라구요. 우리 예수님이 원래 그러실분이 아닌데 말이죠. 그리고 죽은사람의 관을 만지는 것은 그때 유대인들에게는 부정한 것이라고 해요. 그래서 이일로 인해서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요한에게 가서 말하자, 세례요한은 확인받고 싶어했던 것 같아요. "정말 당신이 그리스도인가?" 하는 검증을 받아야만 했죠.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이 모든부담을 짊어지면서까지 죽은사람의 관을 만지셨는지, 그냥 만지지 않고, 일어나라고 하면 되었을텐데 말이죠. 오늘 기독교사선생님들과 만나 해석방향에 따라 핵심메시지가 뭔지, 그리고 나에게 주는 교훈이 뭔지를 알아가면서 알게 되겠죠. 그런기대가 있어요. 분명한 것은 이 시대의 약자들에게 우리 주님은 아주 많이 적극적이시다라는 것과 우리의 위로와 주님의 위로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 마지막으로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점이 분명히 있다는 거에요. 이번주에는 학교에서 설교도 해야하고, 용산초등학교라는 곳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수업 컨설팅도 해야 하는데, 시골에 있는 다문화 아이들, 듣고, 말하고, 읽고, 쓰기가 힘든 그아이들에게 예수님이 그랬던 것 처럼, 아무 이유없이 그들을 사랑하고 싶네요. 그리고 그 아이들을 데리고 수업을 하는 선생님께 위로하고, 그 학교 관리자들을 의식하지 말아야 겠다고 제 나름데로 적용해보게 되네요.

 

-말씀과 기도로 사람을 세우는 복남이^^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