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냇가에 심은 나무 /달달한 묵상일기

행하며 가르치는 자가 되게 하소서

복남진우 2019. 4. 22. 06:53


2019년 4월 22일 묵상일기


"십자가는 하나님의 몸의 언어이며 우리는 그 십자가에 반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부활의 신앙이다."라는 어제 설교 말씀의 메시지가 와닿는 것 같아요. 끊임없이 여러 역할에서 오는 긴장과 모순속에서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는지? 선택의 문제속에서 갈등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의 욕심과 탐욕이 아닌 이상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묻고 내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게 되는 것 같아요. 성경전체를 따라가며 때때로 멈춰 서서 주님께 나의 생각과 감정을 정직하게 나눌 때, 사랑과 진리의 말씀은 살아 움직이는 인격체로 다가올 것임을 믿어요. 그리고 이 시점에서 '열정'이라는 말을 묵상해봐요. 열정은 질투로 번역되기도 해요. 그래서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너무나 아름답고 선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무언가로 인해 빼앗길 때, 비천한 우리가 마땅히 느껴야 할 강렬한 고통이 열정이다."라고요. 저는 일의 욕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열정이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해요.

 성경에서 열정이 넘쳤던 사람을 뽑으라고 하면 '바울'이라는 인물일거예요. 그래서 주말동안 '바울'이라는 영화를 봤어요. 바울은 어느 목사님의 말씀처럼 "쪼잔하지 않은 사람"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쪼잔하지 않다라는 것은 마음씀씀이의 폭이 좁지 않다라는 말이예요. 쪼잔한 사람들은 마음씀씀이 좁아서 쉽게 시험에 들거나,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 것 같아요. 우리가 흔히 동역자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동역자 라는 말은 동료라는 말로 함께 꿈을 꾸며 큰그림을 같이 그려나가는 사람을 말해요. 바울이라는 영화에서 동역자는 '누가'였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동역자들과 함께 더 큰그림을 그려 나가라고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같아요. 이 시대를 향산 사명의식을 우리에게 주시는 거죠. 세상을 변화시킬 복음의 전달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왜 우리는? 왜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일까? 반성하게 되네요.

 밥피어스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로 인해 제 마음도 아프게 하소서"라는 문구가 나와요. 정말 저 또한 제가 있는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로 인해 제 마음도 아파오길 소망해요. 그럴때 윌리엄캐리가 말했듯이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일을 기대할 수 있는 거고,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기대하라!! 시도하라!! 오늘 아침 계속 저에게 울리는 말들이네요.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시도했던 사람이었고, 그의 언어는 위대한 도구로 쓰임 받았아요. 그럼 나는 나의 언어가 위대한 도구로 쓰임받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돼요. 나같은 부족하고 평범한 자를 쓰시는 이유가 결국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내기 위함을 이시간 깨달음으로 다가오네요. 그리고 앞으로 말과 행위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자가 되고 싶어요. '가르치기만하고 실천하지 않는자' 가 아닌, '행하며 가르치는 자'가 되길 결단해봐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경험했던 인물이었어요. '위대한'이라는 말을 평소 좋아하지는 않지만, 사도바울에게는 쓰고 싶어요. 위대한일을 꿈꾸며 기도하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져서 담대히 전했던 자이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결국 사도바울이 위대하다는 말이 아니라, 사도바울을 쓰신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는 말이죠. 그는 그저 하나님을 향산 신실함이 있었고, 거룩한 습관을 가지고 있는 자였어요. 그것이 우리의 유산이 되었죠. "무엇이 가치이 있는 일인가?" 본회퍼 목사님의 말씀처럼, 그리고 사도바울처럼 내가 묵묵히 내 자리에서 해야 할 위대한 한 일들을 기도하며 시도하길 소망해요.


-말씀과 기도로 사람을 세우는 복남쌤^^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