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러주시는 이름에 따라
2017년 4월 16일 묵상일기. 기분날씨 : 좋음.
서른 후반을 향하고 있는 내가 믿겨지지 않아요. 20대의 시절이 지나고, 30대에 들어설 때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30대 중반이 꺽이고 후반대를 향해 간다는 것이 신기하면서, 세월을 아껴야 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되네요. 분주한 삶이 관계를 잠식하고 있지는 않은지 많은 경계를 세우지만,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아쉬운마음이 컸던 한주였고, 몸상태가 빨리 회복 되지 않음을 보고 체력의 한계도 느끼게 되는 한주 였던 것 같아요.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에요. 요한복음 20장 11절에서 14절 말씀을 보면, 마리아 빈 무덤을 보고 울고 있었는데, 횐옷을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에게 물어요.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그러자 마리아는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하고 대답을 해요. 마리아는 뒤에 예수님이 서 계신을 것을 알지 못했어요. 예수님께서는 우는 마리아에게 물어요.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그러자 마리아는 예수님이 동산지기인줄 알고 동산지기에게 말해요. "당신이 우리 주님을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마리아야"라고 부르죠. 그 순산 마리아는 "주님"하며 반응을 하는 장면이에요.
저는 이장면을 보면서 많은 감동이 되었어요.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존재로 마리아를 부르신 것 처럼 나를 사랑하는 존재로 부르고 있다는 깨달음이 나를 감동케 했기때문이에요. 마리아는 주님이 뒤에 서 있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주님인지 몰랐어요. 단지 동산지기인줄 알았던 거죠. 그런것 처럼 내 주변에 계신 주님은 어떠한 모습을 서 계실지 궁금해요. 그런데, 저는 그런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거겠죠. 그렇다면 왜 나는 주님을 발견하지 못할 까?를 생각해보면, 내가 함께하는 사람과 주님이 함께하는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성경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누구와 함께 했을까?를 생각해보면, 주님의 부활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소외되고 고통받는 자들에게 친히 찾아 오셨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증거를 보여주신거죠. 내 주변에 있는 아이들을 생각해보게 돼요. 알게 모르게 외로워하고 있는 아이가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게 되네요.
사랑의 종류에는 여러가지가 있다고 하자나요. 남녀간의 사랑인 에로스, 가족간의 사랑인 스트로게, 친구간의 의 우정인 필리아, 조건없는 사랑인 아가페!! 바로 주님의 사랑은 조건없는 사랑인 아가페적인 사랑임을 부활의 주님을 통해서 다시한번 발견하게 되네요.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어떤 조건이 붙는것 같아요. 흔히 이렇게 자주 말하자나요. "네가 이거 해주면, 나도 너에게 이거 해줄게" 이런것 처럼 뭔가 꼭 조건이 붙는 것 같아요. 조건없이 누군가 나에게 "진우야"라고 불러준다면, 저는 사랑받고 있다라는 사실에 참으로 많이 행복할 것 같아요. 뭘 시키기 위해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무언가 부탁하기 위해 나를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그냥 "진우야" 라고 불러주시는 주님의 은혜로 저는 오늘도 그리고 이번한주도 살아낼 수 있는 힘을 얻는 것 같네요. 저 또한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아무 조건없이 모든 사랑을 담아 불러 보고 싶네요.
-말씀과 기도로 사람을 세우는 복남이^^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