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맛이 아닌, 주님의 떡을
2016년 11월 3일 묵상일기. 기분날씨 : 좋음
말씀사경회를 통해 깨달음이 커서 인지 다시금 되새김질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번에 나눌 말씀은 요한복음 6장 1-15절 말씀이에요. 이 말씀은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말씀이에요. 그래서 오병이어의 말씀은 다른 공관복음에도 기록되어져 있어요. 하지만, 요한복음과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돼요. 요한복음은 다른방식으로 언급을하고 있어요. 정리를 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 예수님이 직접 나눠주셨다.
- 사람들의 반응이 언급되었다.
- 제자들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 유월절이 언급되었다.
- 한아이가 언급되었다.
- 가르침에 대해 언급되었다.
- 이적을 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 버리는 것이 없게하라고 말씀하셨다.
- 축사하다라는 개념의 차이가 있다. 등등.
이렇게 다른방식을 언급되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목사님께서는 요한복음은 표적으로 시작해 표적으로 끝나는 이야기로 말씀하셨어요. 여기서 표적은 기적과 같으면서 다른 말인데, 헬라어로 '세메이온'이라는 말인데, 그 말의 의미는 기적을 포함해서 자신을 알라기 위한 기적을 뜻한다고해요. 즉, 예수님은 기적을 통해 예수님 자기 자신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 표적인거죠. 그렇다면, 누구로 알기를 원하셨을까? 하는 질문이 드네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기대했어요(신18장 15-18절), 14절에 보면 '그 선지자'라는 말에서 알 수 있어요. 그렇다면 여기서 또 질문을 던져보면, 왜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고 기대했을까? 하는 점이에요. 아마도 그들은 '만나기적'에 대한 전승을 기대했을 거에요.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만나'를 주실 것으로 생각한거죠. 구약성경에서 메시아의 표징으로 유월절의 만나를 언급하셨으니깐요. 즉, 유월절에 만나가 다시 내리실거라고 그들은 믿고 있었던거에요. 그런데 때마침, 예수님이 그들에게 유월절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던거에요. 그래서 요한이 오병이어의 표적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예수님이 나눠준 그 떡이 만나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신명기 8장 3절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주신 이유가 명확하게 나오고 있어요. 말씀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만나'를 주셨다고 해요. '만나'만을 보지 말고 '만나'를 주신 하나님을 보라는 것이 목적이었던 거죠. 동일하게 오병이어의 표적의 상황속에서도 말씀하고 계세요. "떡을 보지 말고 떡을 줬던 나를 봐라"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무리들은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을 보였어요. 오병이어의 표적 이후 예수님을 계속 따라다녔어요. 왜냐하면, 배고픔을 해결해줬기 때문이죠. 무리는 예수님께 요청해요. "배부름을 경험하고 싶어서 찾아 따라 왔어요"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내 살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자 오랫동안 따라다녔던 제자들조차 떠나버렸어요. 매일 떡을 먹겠구나 하고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의 알 수 없는 이유와 가르침에 제자들은 떠나간거죠. 왜냐하면 그들은 떡을 좆은거지, 예수님을 좆으려 한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요. 즉, 예수님의 맛이 아닌, 그 떡맛이 좋아서 예수님을 따랐던거였어요.
"사람은 잘 자기 위해서도 충분한 어둠이 필요하지만 잘 살기 위해서도 충분한 어둠이 필요하다" 라는 말이 있어요, 우리는 기도를 할 때 잘될때가 있죠. 체험과 뜨거움을 경험할때가 그런것 같아요. 하지만 냉랭함과 메마름가운데 기도할때에는 힘들죠. 그리고 스스로를 판단하게 돼요. "내가 기도를 잘 못하고 있나" 하면서 죄책감마져도 들게 돼요. 하지만, 되돌아 보면 "나는 예수님이 아닌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의 체험을 따르고 있었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돼요. 내가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한거죠. 어떠한 상태이든 나의 신실함으로 반응하면 되는 것을 떡맛에 익숙해지다 보니 배부름의 신앙만 배우게 된 것 같아요. 배고픔의 신앙도 귀하다는 것을 보게 되네요.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지 나의 탐욕까지도 채워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해요. 떡맛이 아닌 주님의 맛에 취하며 살고 싶어요. 회심은 운영체제를 바꾸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마주할 용기가 없는 것 같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말이죠. 그런 세대를 통해 나의 영혼의 식습관을 살펴보게 돼요.
요한은 이 오병이어의 표적을 최후의 성만찬으로 묘사했어요. '축사하다'라는 말은 유카리스테사스로 표현되었는데, 이 단어의 의미를 해석해보면, 최후의 만찬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돼요.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는 장면으로 예수님이 직접 나눠주신것으로 묘사한거고,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던 자리로 본거였죠. 그래서 요한복음의 최후의 만찬 장면의 초점은 실제로 세족식으로만 맞춰저 있고,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는 장면은 없거든요. 그런데 바로 오병이의 표적을 통해 나타나고 있어요. 예수님이 직접 떡을 나눠준거로 표현하고 있는 것도 그 이유인거죠. 예수님을 먹는다라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먹는다는 것을 의미해요. 유진피터슨의 <<이 책을 먹으라>>에서 먹음의 역학에 대해 말하고 있어요.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먹고 산다. 성경은 음식이 인간의 몸에 영양분을 주듯이 거룩한 공동체에 영양분을 준다. 그리스도인은 단지 성경을 배우거나 연구하거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흡수한다. 그것을 우리의 삶으로 가져와 물질대사를 시켜서 사랑의 행위를 하고 시원한 물을 대접하게 하며, 온 세상에 선교가 일어나게 하고, 치유와 전도를 일으키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정의를 행하게 하고, 성부 하나님을 경배하며 두 손을 들어 올리게 하고, 성자와 함께 발을 씻기게 한다."
브리야 사바랭이라는 사람이 말했어요. "당신이 먹는 음식을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예수님은 자기를 먹으라고 말씀하셨어요. 왜냐하면 그길이 살길이니깐요. 나는 무엇을 흡수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돼요. 예수님이 나의 체질이 될 수 있도록 그분의 말씀을 흡수하고 싶어요. 디모데후서 4장 4절에 "허탈한 인생을 따르지 말라"고 교훈을 주고 있는데, 주변사람들로 인하여, 주변환경으로 인하여 '허탈함'을 흡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치 애기입맛처럼 자극적인 맛만 흡수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게 돼요. 예수님의 맛은 심심하고, 밋밋하기 때문에 찾지 않게 되는데, 나는 무엇을 먹고 있는지, 어떤 맛을 흡수하고 있는지? 게다가 누구와 함께 먹고 있는지? 더 나아가 제때 식사하지 못하는 이가 누구인지? 굶은이는 없는지? 살펴보려고 해요.
주님은 혼밥이 아닌 공동식사를 원하시고 계시기 때문에요. 함께 먹는 떡을 원하시는 주님을 따르기 원해요. 함께 먹는 자들이 모인곳 그곳이 공동체가 아닌가 싶고요. 그 공동체 속에서 비난받기 위해 이 자리에 서있음을 고백해요. 칭찬의 상황속에 도취된 나, 갈등속의 내가 혼란스럽지만 솔직하게 고백하지만 둘다가 '나'이거든요. 내가 먹고 싶은 떡이 아닌, 내가 먹어야만 한느 떡을 먹고 싶어지는 오늘이네요.
-말씀과 기도로 사람을 세우는 복남이^^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