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냇가에 심은 나무 /달달한 묵상일기

시간속에 공간을 만드시는 예수님

복남진우 2016. 11. 3. 11:42


2016년 11월 3일 묵상일기. 기분날씨 : 좋음


 지금 최순실게이트로 나라가 혼란스러운데, 하루빨리 정의가 바로 세워지고 진실이 규명되어졌으면 하는 바램이 커지네요. 뉴스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어떻게 이런일이?"하는 생각에 분노를 넘어 허탈감마저 들게 하는 것 같아요. 어디를 가나 그 이야기이고, 박근혜대통령님을 뽑았다고 하신 분도 지금은 너무너무 후회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리더의 자리'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월요일부터 어제까지 말씀사경회가 있었어요. 첫번째로 나누고 싶은 본문말씀은 요한복음 5장 1-9절 말씀이에요. 주제는 "절망에 익숙한 이에게"라는 주제에요. 베데스다라는 장소가 등장해요. 그리고 예수님과 38년된 병자가 등장하죠. 베데스다는 요즘말로 중환자들이 있는 종합병원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치유의 장소로 인식되었어요. 아마도 간헐천으로 예상되는데 그곳에 먼저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은 가장 건강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었을거에요. 왜냐하면, 가장 심하게 아픈 사람은 거동도 불편할텐데 가장 먼저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했을거니깐요. 그래서 가장 고침이 필요한 사람은 연못에 들어가지 못했던거죠. 그럼에도 아주작은 희망때문에 그곳을 떠나지 못했던 것이 현실이었어요.

 그곳에 예수님이 찾아오셨던 거죠. 그리고 38년된 병자에게 물어요. "네가 낫고자 하느냐?" 정말 예수님은 알수가 없는 분인거 같아요. 당연히 낫고 싶어 그자리를 지키고 있는 병자에게 당연한 질문을 하고 있으니깐요. 그곳은 희망고문의 장소가 되어버린지 오래였고, 절망을 주는 곳이었어요. 33살이 로마시민들의 평균수명이라고 할 때 38년된 병자의 상태는 어떤상태였을까를 추측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완전 절망의 상태였던거죠. 무력감, 우울감, 냉소의 상태!! 이런 상태가 병자의 상태이지 않을까 싶어요. 예수님은 솓아나는 샘물로 그 병자에게 찾아가셨어요. 다시 강조하고 싶은데, 예수님이 아무 연고도 없이, 아무 조건도 없이 직접 찾아가셨다는 거에요. 그것도, '솓아나다'라는 뜻을 생각하고 다시 해석하면, 빠른움직임으로 병자에게 찾아가신거에요. 즉, 예수님은 움직이는 물이 되어서 얌전한 물에 있는 병자에게 찾아와서 직접 뛰어들었던거죠 그것도 재빠르게 말이죠. 

 늘상 '미끄러짐'을 경험하고 있는데, 그 미끄러짐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최고의 위로가 뭘까?를 생각해보게 돼요. 아픈사람에게 아푸지 마라 라고 말하는 것이 위로일까요? 결혼하지 못한 사람에게 결혼해야지 라고 말하는 것이 위로일까요? 우리는 너무 빠르고 단정적으로 정답을 주고 있는 것 같아요.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이야기라고 해요. 정말 생각해보면, 인생의 소망으 포기할 때즈음 주님은 나타나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나 여기에 있어"라고요. 그리고 소망을 주시죠. 430년의 애굽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망과 무력, 좌절을 맛보고 있었을거에요. 그리고 그 맛에 익숙해질때 주님은 계획을 가지고 그들에게 찾아가셨어요. 그래서 절망이 있는 곳에 '은혜'가 있다라는 말이 있나봐요. 지푸라기조없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시는 예수님!! 정말 멋진것 같아요.

 어떠한 형식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지만, 환경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것 같아요. 우리에게 그 힘이 없다 보니 징징거리고, 투덜거리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그 징징거림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거에요. 

 베데스다는 허상이었어요. 다른 곳에 소망이 없었기 때문에 병자들은 거기에 있었던거고요. 그리고 그들에게 기대가 없었어요.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물이 되었던거고요. '이분이 진짜 베데스다구나', '이분이 진짜 자비의 분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어요. 저마다 소망하는 베데스다가 있다고 봐요. 하지만 절망을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고 봐요. 해석의 부재가 우리를 절망에서 나올 수 있게 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부분이 정말 중요한 부분인것 같아요. 징징됨의 원인은 결국 해석의 부재라는 것인데, 나에게는 어려운 상황과 절망의 상황속에서 그 상황들을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힘이 있느냐?라는 질문에 저는 직면하게 되면서 하나님앞에 나아갈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아니!! 나아가야 되는 거고, 나아갈꺼에요.

 인생의 풍랑은 늘 언제나 우리 주변에 있다고 해요. 근데 여기서 핵심은 풍랑이 잠잠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풍랑이 있어도 목적지까지 갔다는 거에요. 풍랑가운데 '물위에 걸어오신 예수님'에 대해 우리는 많이 들어왔어요. 우리는 풍랑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물위에 걸어오신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 떨었을지 몰라요. 제자들처럼 말이죠. 그것은 배안에 있는 예수님을 보는 것에 익숙하지만, 풍랑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을 보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인것 같아요. 

 요한복음에서는 물의 이야기는 계속돼요. 요한복음 2장부터 예수님은 성전으로 비유했고, 그 성전에서 솓아나는 물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계속해서 모든사람에게, 모든곳으로 흘러들어가요. 성전에서 솓아나는 물이 흘러가서 젖게 되면 절망에 익숙해져 살아가는 사람들이 희망으로 변화 되어가는 과정들을 묵상하게 돼요.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잣대로 보고 단정하고 판단했어요. 유대인들의은 그들의 법인 '마쉬나'의 잣대로 봤지만, 예수님은 유대이들의 그런 근간들을 계속 건들면서 "성전이 나다, 물이 바로 나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들은 병자의 안식과 회복에 관심이 없고 자기네들의 규정의 잣대로 안식을 어긴것에 대해서만 집중했어요. 그들은 안식일은 지켰지만, 안식하지 못했던거죠. 다시말해서 존재를 회복시키는 것과 행위의 모습의 이중잣대가 그들에게 있는거였어요. 그들은 예수님 마저 존재를 규정해버려요. 배우지 못했으면서 어떻세 저런말을 하지? 갈릴리 출신이 어떻게? 어디로 가는거야 뭐라는 거야? 하면서 예수님의 학력과 출신, 연고, 진로로 예수님을 규정해버린거죠.

 교육의 영역도 마찬가지인것 같아요. 종교적인 '무엇'으로 평가하고 판단하듯이, 교육적인 '무엇'으로 평가하고 판단해버리는 오류를 우리는 범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수님은 그 일이 있은후에 치뤄야할 대가가 컸어요. 안식일의 규정을 어긴거니깐요. 심지어는 '안식일은 나다'라고 말씀까지 하시니, 그들은 미치고 환장했을 거에요. 말씀을 전하셨던 김익환목사님이 이런고백을 하더라구요. "사역자는 누군가의 안식을 위해서 자신의 안식을 희생하는 자리"라고요. 

 이 고백을 들으면서 제자신을 되돌아보게 돼요. 기독교사로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 했던 것 같아요. 사역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아닌 뒤로 물러나는 법을 배우는 것인데 말이죠. 뒤로 물러난 만큼 공간이 생긴다는 것을 몰랐어요. 그리고 그 공간에서 우리 아이들이 안식하게 된다는 것을 몰랐어요. 사람을 낚는 교사가 아닌 사람을 낚는 덫이 되지 않았나 반성해보게 되네요.

 시간속에 공간을 만드는 주님을 묵상해요. 간음한 여인을 놓고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던 그 상황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물러가게 하고, 간음한 여인에게 '안식'을 주셨자나요. 안식에 대해 요즈음 많이 생각해보게 되는데요. 안식은 환경안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안에서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네요. 그래서 예수님과 관계를 맺음으로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무슨말씀인지 알겠어요. 안식을 누리고, 안식을 선물로 하는 내가 되기를 소망해요. 그리고 뒤로 물러나면서 아이들에게 공간의 안식을 주고 싶네요.


-말씀과 기도로 사람을 세우는 복남이^^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