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냇가에 심은 나무 /달달한 묵상일기

하나님께 나아가는 마음의 찔림

복남진우 2016. 7. 11. 00:57


2016년 7월 10일 묵상일기. 기분날씨 : 좋음.

오늘한일 : 주일성수, 신혼여행계획, 친구와의 만남


"다른 과학에서 사용하는 도구는 여러분의 외부에 있는 것들(현미경이나 망원경처럼)인 반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도구는 여러분 자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자아가 깨끗하고 밝지 못하면, 하나님의 모습 또한 더러운 망원경 렌즈로 보는 달처럼 흐려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순전한 기독교, 루이스>>


 이찬수목사님의 말씀을 들었어요.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이 뭘까?를 생각해보게 하는 말씀이었어요. 목사님은 부끄러움을 인식하는 것이 부흥이라고 말씀하시더라구요. 요시야 왕은 강력한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왕이었어요. 그는 우연히 성전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율법책'을 발견했어요. 그리고 그 율법책을 보고, 옷을 찢음으로 극심한 고뇌를 표현하였어요. 이것은 하나님앞에서 '회개하는 마음'을 표현한거에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생각해봤어요. 선교사님이 말씀사경회를 하셨는데, 1주일을 더 연장해서 말씀사경회를 했다고 해요. 그때 장대현교회의 길선주목사님이 갑자기 일어나셔서 앞에 나와 고백을 했다고 해요. 그 고백의 내용은 친구에게 돈을 받았는데, 일부를 쓰고 나머지 일부만 그 친구의 가족에게 돌려 주었다는 고백이었어요. 이것을 계기로 거기에 모였던 700명이 이어서 회개를 했고,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해요. 이때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들이 많고요.

 예기치 않은 회개의 불씨가 결국 평양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각 지역으로 퍼지게 되는 역사를 가져왔듯이, 길선주 장로님의 부끄러움의 자각이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의 자리로 가게 하였고, 부흥의 씨앗이 되었어요. 이처럼 우리감각이 무디지 않았나 살피고 또 살펴야 겠어요. 부끄러움을 모르는 그런 무감각을 경계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부흥의 전제조건은 '부끄럼을 자각'하는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거에요. 요한계시록에서 주님께서 교회의 벌거벚음을 책망해요. 저는 이렇게 표현해 보고 싶어요. "익숙해짐의 부유함" 바로, 익숙해짐의 부유함이 영적인 나태를 가져오게 된거죠. "나는 이정도면 괜찮아", "세상이 다 그러는데 왜 나만" 하는 익숙함이 저에게도 있음을 발견하게 돼요. 그래서 하나님은 저에게 우연히 말씀속에서 지속적으로 "너는 벌거벚은자"임을 인지하게 해주시는 것 같아요. 부끄럽네요.

 요시야 왕은 자신의 죄때문에 회개한것이 아니었어요. 바로 아버지 므낫세의 잘못으로 회개했어요. 하지만 그는 남을 탓하지 않고, 우리의 죄로 인식하고 회개했던거였어요. 윤동주시인의 삶을 묵상해봐요. 그의 삶을 연구한 전병욱교수님은 한마리도 그를 이렇게 표현했어요. "남을 헐뜯지 않은 사람, 비통한 삶을 살았지만, 상황을 탓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평가를 했어요. 

 저또한 고백해요. 우리교회를 보면서, 참으로 원망을 많이 했어요. 누구누구를 보며, 난 그사람과 달라 하면서 얼마나 교만했는지, 반성하게 되네요. 어쩌면 난 그들과 달라하는 마음이, 나는 저 케이스가 아니야 하면서, 나도 저런 케이스를 만들어 빠져나가야지 라고 생각했던 저의 교만함을 돌이키게 되네요.

 요시야 왕은 부끄러움을 자각했고, 그것을 하나님앞에 가지고 나갔어요. 도덕심도 아닌, 정치력도 아닌, 바로 하나님께 말이죠.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유대인들이 돌이킬때 "마음이 찔려" 돌아 왔다고 해요. 그리고 그 찔리는 마음으로 주님앞에 가지고 나아갔고요. 그리고 엄청난 역사가 일어났어요. 대조적으로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또한 마음에 찔렸지만, 스데반을 돌로치는 포악함으로 반응했어요.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이렇게 달라지는 거죠.

 "하나님께 나아가는 마음의 찔림" 이것이 핵심인것 같아요. 주님이 우리의 부끄러움을 대신져주셨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 아이들 앞에서 설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의 부끄러움을 가지고 나아가네요.


-말씀과 기도로 사람을 세우는 복남이^^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