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자신을 묶는 기도
2016년 6월 5일 묵상일기. 기분날씨 : 좋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김상권>>이란 책이 갓피플 묵상의 글에 올라왔더라구요. 그래서 한문장 한문장 묵상하듯이 읽어 보았어요. 요즈음 마음이 무거워서 그런지,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다'라는 문장이 위로가 되었어요. 그것도 그저 죄를 범한 자들을 위한 긍휼한 기도나 동정의 기도가 아닌, 시험을 없애달라고 하는 기도가 아닌, 시험을 이기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는 점이 기도에 대한 저의 관점을 바꿔주게 한 것 같아요.
만약 주님이 베드로를 위해 기도할 때 '넘어지지 않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했다면, 옳았을까?를 생각해보게 돼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위해서 분명히 기도하셨어요. 하지만 베드로는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말았어요. 예수님을 3번씩이나 부인했자나요. 어떻게 보면 아무 능력이 없는 기도처럼 보이는데, 베드로를 위한 주님의 기도는 뭘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돼요. 어떻게 보면 능력도 없고 아무 효력도 없어 보이는 이 예수님의 기도는 도대체 어떤 기도일까요? 서두에 이야기한 그 책에서는 그렇게 묻고 있어요.
누가복음 22장 31-32절 말씀을 묵상해봐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여기서 '기도하다'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주님이 기도를 가르치실때의 그 단어가 아니라고 해요. 이 '기도하다'라는 뜻은 원어러 '데오마이'라는 말로, '뭐뭐에 무엇을 묶다'라는 어근을 가진 단어라고 해요. 즉, 주님의 이 기도는 그저 시험을 이기게 해달라는 차원의 기도가 아니라는 거죠. '주님 자신을 묶는 기도였다'라는 거에요.
예수님께 나를 묶는 기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에게 직접자기 자신을 묶으신 기도라는 사실에 은혜가 돼요. 이 말을 해석해보면, 내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된다는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짓고 넘어지는 자리에도 예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돼요. 주님께 묶인 고무줄에 의해서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개념이 아니라 내가 어떤곳을 간다할지라도 자진해서 그곳까지 따라와 함께하신다는 개념인데, 이것은 자기자신을 부인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기도라는 것을 인식하게 돼요.
그래서 더욱 은혜가 되는 것 같아요. 주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실때, 우리에게 자신을 묶으셔서 끊임없이 우리의 죄를 씻기심으로 더러운 우리와 상관있게 만드신 기도라는 점이 더욱 은혜가 돼요. 자기자신까지 부인해버린 사랑과 희생에 감격스럽고요. 왜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를 위해 그렇게 기도하시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돼요. 위에서 묵상했던 누가복음 말씀에 '형제들을 굳게 하기 위해서'임을 보게 돼요. 즉,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라는 거에요.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섬기는 자가 큰자라고 하는가봐요. 잘못을 꾸짖고 정죄해서 굳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형제에게 나를 묶어 나를 부인함으로 섬기라는 것임을 계속 마음속에 새겨봐요.
저는 오늘도 넘어지고 또 넘어져요. 하지만 저는 오늘 깨달았던 메시지를 기억해요. 죄인된 나를 위해 자기를 부인하며 섬기신 그 사랑을요. 이제는 제 차례겠죠. 내가 맡고 있는 아이들을 더욱 굳게 하기를 결심해보네요.
-말씀과 기도로 사람을 세우는 복남이^^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