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냇가에 심은 나무 /달달한 묵상일기

나의 고백, "주님의 나의 구주이십니다."

복남진우 2016. 2. 25. 11:06


2016년 2월 24일 묵상일기. 기분날씨 : 심난함.


 미디어자율연수를 받았고, 교육지원청에서 간단한 발표를 마쳤어요. 거기에서 제가 받았던 질문이 있었어요.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교사란?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그럼 예수님이 석가모니를 만났을 때 뭐라고 말씀하셨을까?"하는 질문이었어요. 그리고 사석에서는 "생활이 안되면서 그 일을 한다는 것이 힘들지 않나요? 힘을 빼고, 생활을 먼저 챙겨야 하는 거에요." 라는 말을 들었어요. 이것은 질문이라기 보다는 나에게 해주는 '조언'이었어요. 저는 많이 흔들렸어요.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어요. 제가 흔들렸던 것은 내가 공부를 계속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질문때문이었어요. 죄의 결과로 나타나는 감각적은 증상들을 제거해서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고 싶은 욕구가 나에게 없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나에게는 무거운 짐이라는 거에요. 그리고 그리스도의 역사가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 성취하려 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평안을 누릴 수 있을지 몰라도 장차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거든요. 이 영역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믿음의 영역이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수 있을까요? 저에게 계속 이 질문을 던진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냥 믿어요. 저는 예수님이 주되심을 고백하고,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요.

" 2000년전의 예수님이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다면? "이라는 질문이 이어졌어요. 이 질문자체가 저는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고, 보혜사 되신 성령님을 통해서 확신을 주시고, 내면에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다시금 살 수 있는 건데, 위의 질문들은 자신의 이단성과 오류를 교묘히 감추고 있기 때문에 저를 불편하게 했던 것 같아요. 그리스도를 말한다 해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본향으로 데려갈 구세주로서가 아니라 모범적인 삶을 산 본보기로 언급할 뿐임을 꼭 말해주고 싶어요. 생명을 건지기 위해 필요한게 본보기인가?, 아니면 구세주인가? 내가 믿는 주님은 본보기를 넘어, 나의 구주이며, 나의 구원자이며,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다시한번 고백해요.

 다시한번 강조하고 싶은데, 예수님이야 말로 나의 무거운 짐을, 죄성들을, 연약함들을 은혜와 사랑으로 반가이 맞아 주신다는 거에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아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내가 지금 좁은문, 생명의 길을 가고 있어요. 기독교사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거든요.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나의 짐은 죄 자체가 아니라 나의 죄의식임을 고백하고 싶어요. 어쩌면, 죄에 대한 민감함과 아이들 앞에서의 책임감 있는 삶에 대한 부담감일 수 있어요. 윤종현의 <<마음 살리기>>에서 이런 말이 나와요.


"치유는 나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내 아픔과 고통을 정직하게 주님 앞에 드러내는 것 까지 임을 기억하자. 성경에서는 이것을 쓴 뿌리, 내가 믿는 거짓말, 육체의 생각 등으로 표현한다. 이 생각들이 제거되고 변화될 때, 거짓말이 하나님의 진리로 바뀔때, 육체의 생각이 영의 생각으로 바뀔 때, 쓴 뿌리가 단 뿌리로 바뀔 때 궁극적인 치유가 일어난다."


 기도해요. "주님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치유하소서, 그리고 주님의 기쁨의 열매 맺게 하소서"


-말씀과 기도로 사람을 세우는 복남이^^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