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22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역사기행(2)
두번째날이 밝았어요. 부랴부랴 아침을 챙겨먹고 갑곶돈대로 향했어요. 두번째 일정은 강화도 나들길 2코스인 '호국돈대길'을 걷기로 했거든요. 오래전부터 강화도는 나라의 안전을 지켜 주던 소중한 터전이자 외국의 문화가 바닷길을 통해 육지로 들고나던 관문이었어요. 남과북의 강이 모여 흐르는 바다를 따라 걷다보면, 외국과의 충돌에 대비하기 위해 섬을 빙 둘러 만든 돈대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돈대의 사전적 의미는 경사면을 자르거나 흙을 돋우어 높게 편탄지를 만들고 옹벽을 구축한 곳을 말한다고 해요. 나들길 제 2코스인 호국돈대길을 걷다보면 최진돈대까지 10개가 넘는 돈대를 만날 수 있어요. 그런데 강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어요. 강화도가 조선의 영토에 포함된다면 진과보, 돈대 중 가장 큰 규모인 5개의 진은 강화도 동서남북 해안에 고루 위치하든가 중국과 마주 보는 강화도 서쪽 해안에 좀 더 비중 있게 자리 잡아야 하는데 5개의 진은 모두 강화도 동쪽 해안에 있다라는 거에요. 이것은 방어에 유리한 지형적 특성도 있겠지만 적어도 강화의 5진이 강화를 보호하거나, 혹은 한반도의 영토를 다른 나라로부터 방어하려는 이유보다는 왕조와 수도 서울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지 않았을까 싶어요. 또한 염하가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의 운송로였음을 감안하면 왕조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의 경제적 기반과 군사적 보호가 더 큰 설치 목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정묘호란 당시에 인조는 후금(청)의 침입에 대응하여 이곳 강화로 피난을 왔어요. 한양에서 김포를 지나 강화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좁은 염하를 건너야 했어요. 인조는 김포에서 손돌이라는 뱃사공에게 길안내를 맡겼으나 심한 물살과 물살에 뒤척이는 배의 움직임에 불안해졌어요. 불안에 떨던 인조는 손돌을 의심해 결국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고, 죽음에 앞서 손돌은 바가지를 물길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 강화로 건너가라고 알려주었어요. 바가지의 움직임을 따라 강화에 도착한 인조는 그때서야 그의 진심을 알고 손돌의 장례를 명하여 광성보 맞은편 김포 덕포진에 묘를 쓰게 되었어요. 이후 물살이 거센 이곳에 손돌목이라는 이름이 생겨난거에요. 자신의 안위를 위해 궁궐을 떠나면서 자신이 사랑하고 지켜야 할 백성을 신뢰하지 않았던 인조에 대한 원망이 손돌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거죠. 그 외에도 많은 역사적 사실과 의미가 담겨진 곳이 많았어요. 정말 말그데로 눈과 귀 그리고 발이 어울려 만들어낸 역사기행이었어요. 그리고 초지진에서 갑곶돈대로 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이또한도 좋은추억을 남기고 숙소로 돌아와 아이들과 함께 토론도 하며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토론의 주제는 "강화도 주민들은 수도이전을 환영했을까?"하는 거였어요. 민족의 자주성과 강화주민들의 한사람한사람의 생명이라는 핵심적인 논쟁을 통해 아이들이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을 것 같아요. 늦은 시간 내일 '마니산 참성단'을 기대하며 그렇게 오늘하루를 마무리했네요. 그리고 잘 마무리 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요.
-말씀과 기도로 사람을 세우는 복남이^^V-